2022년 이후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지원법(CHIPS Act)을 통해 제조업 회복과 에너지 자립을 꾀하고 있으며, 이를 통상정책과 긴밀하게 연계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세 정책은 단순한 무역장벽에서 벗어나, 세금 감면, 보조금, 생산기지 조건 등과 결합된 복합 정책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IRA와 CHIPS법의 핵심 내용과 이로 인한 관세정책의 변화, 기업과 국가의 전략적 대응 방향을 심층 분석합니다.
IRA·CHIPS법의 주요 내용과 통상정책 연계 구조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Inflation Reduction Act)은 2022년 미국 의회를 통과한 대규모 산업·기후 법안입니다. 총 3700억 달러 이상이 청정에너지 확산과 탄소중립 인프라 구축에 투입되며, 그 중 상당 부분이 세액공제 및 보조금의 형태로 집행됩니다. 핵심은 미국 내에서 생산된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모듈 등에 최대 7,500달러에 이르는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CHIPS & Science Act는 반도체 산업에 초점을 맞춘 법안으로, 미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투자에 대해 총 520억 달러 규모의 보조금과 세금 감면을 제공합니다. 특히 미국 정부는 기술적 전략 자산으로 간주되는 반도체 공급망을 외국 의존에서 자립화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이 두 법안은 미국 내 제조 부흥을 위한 ‘채찍과 당근 전략’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당근은 세금 감면과 보조금, 채찍은 관세 및 보조금 조건 제한입니다. 세금 혜택을 받으려면 생산은 미국에서, 핵심 원재료는 미국 또는 미국과 FTA 체결국에서 조달해야 합니다. 이 조항은 실질적으로 특정 국가(예: 중국)의 원재료와 제품을 보조금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이는 곧 간접적인 관세 장벽으로 기능합니다.
즉, IRA와 CHIPS법은 통상 정책과 국내 산업 진흥 정책을 밀접하게 결합하여 미국의 경제안보, 에너지안보, 기술안보를 동시에 강화하려는 전략적 정책 패키지입니다.
관세정책의 변화와 보조금·FTA 연계전략
IRA·CHIPS법은 미국의 관세정책을 전통적인 수입세에서 보조금 연계형 무역장벽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는 단순히 수입품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수입품에 대해 보조금 배제를 통해 실질적인 가격 불이익을 주는 방식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IRA 내 전기차 세액공제 요건입니다. 전기차 보조금 혜택을 받으려면 ▲미국에서 조립되었고, ▲북미에서 배터리를 생산해야 하며, ▲핵심 광물의 일정 비율 이상을 FTA 체결국에서 조달해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소비자에게 보조금이 제공되지 않아 가격경쟁력에서 밀리게 됩니다. 이는 실질적인 수입차 관세 효과를 유발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FTA 체결 여부에 따라 국가 간 격차를 크게 만듭니다. 한국, 캐나다, 멕시코, 호주 등은 미국과 FTA를 맺고 있어 IRA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지만, 중국, 인도, 말레이시아 등은 구조적으로 배제됩니다. 이로 인해 미국과의 통상 관계가 밀접한 국가일수록 공급망 내 위치가 유리해지고, 비우방국은 불리해지는 지정학적 공급망 블록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또한 반도체, 태양광, 배터리, 희토류 등 전략 품목에 대해서는 고율 관세가 여전히 유지되거나 강화되고 있으며, 일부 품목은 안보 논리를 근거로 수출·수입 제한까지 병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통상이 아닌 산업·안보 복합 전략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향후 WTO 체제와의 충돌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대응전략과 생산기지 재편
IRA와 CHIPS법의 시행 이후, 글로벌 제조업체들은 미국 내 생산을 늘리기 위한 대규모 투자 계획을 앞다퉈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지 세제 혜택 때문이 아니라, 보조금 조건을 충족하지 않으면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이 약화된다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는 텍사스에 170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LG에너지솔루션은 GM과 손잡고 오하이오, 테네시 등에서 배터리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현대차는 조지아에 전기차 전용 공장을 착공했고, 도요타·혼다·폭스바겐도 미국 생산라인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기업 단위의 전략을 넘어, 공급망 구조 전체의 재편으로 연결됩니다. 광물 조달처, 소재 가공지, 조립 생산지를 미국 또는 FTA 체결국 중심으로 정비하는 것이 필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국산 소재와 제품이 배제되는 과정에서 한국, 베트남, 인도, 인도네시아 등의 역할이 강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일부 국가는 미국 보조금 혜택을 자국 기업이 받을 수 있도록 양자 협정 또는 WTO 제소 등 외교적 대응을 시도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동맹국 중심의 경제블록이 강화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결론: 보호무역 시대, 전략적 적응이 기업의 생존을 좌우한다
IRA와 CHIPS법은 단순한 산업진흥법이 아니라, 미국의 관세정책, 보조금정책, FTA 정책을 복합적으로 연결한 전략적 보호무역 체계의 핵심축입니다. 이제 관세는 명시적 세금이 아니라, 정책 조건을 활용한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 기능하며, 기업과 국가의 공급망을 재편하는 강력한 유인책으로 작용합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기업은 보조금 조건 분석, 생산기지 다변화, 광물 조달처 확보 등 전략적 판단이 요구되며, 투자자는 IRA·CHIPS법 수혜 기업과 미국 내 제조 확장 기업에 대한 집중 분석이 필요합니다. 또한 각국 정부는 미국과의 통상 협력 강화를 통해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고, WTO 체제 내 공정성 회복을 위한 외교적 전략도 병행해야 합니다.
세계 무역의 규칙은 바뀌고 있으며, 정책의 흐름을 먼저 읽고 전략을 세우는 자만이 미래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